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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포르투니노 프란체스코 베르디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0.10.- 1901.1.27.)

주세페 포르투니노 프란체스코 베르디

처음 마을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한테서 초보교육을 받고, 후에 부세토와 밀라노에서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하였다. 1836년 부세토 시절의 보호자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고, 1839년 밀라노에 나와, 스칼라극장의 지배인 메렐리의 후원으로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를 상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 곧 두 아이와 아내를 잃고 또 희가극 <왕국의 하루>(1840)의 상연마저 실패하여 극도로 우울한 나날을 보냈는데 이때 메렐리와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등의 격려로 용기를 얻어 다시 활발한 작곡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쓴 것이 오페라 <나부코>이다. 이 작품은 1842년에 상연되었는데, 그 내용이 애국적이어서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제하에 있던 이탈리아인들에게 크게 어필하였다. 그후에도 <에르나니>(1844), <아틸라>(1846) 등 애국심이 넘치는 많은 작품을 썼다. 이 밖에도 <맥베스>(1847), 실러의 <간계와 사랑>을 각색한 <루이자 밀러>(1849) 등으로 새로운 극적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리골레토>(1851),<일 트로바토레>(1853), <라 트라비아타>(1853), <시몬 보카네그라>(1857), <가면무도회>(1859), <운명의 힘>(1862), <아이다>(1871), <오텔로>(1887), <팔스타프>(1893) 등은 모두가 19세기 이탈리아오페라의 걸작으로서 높이 평가되며 오늘날까지 상연되고 있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19세기 전반까지의 이탈리아오페라의 전통 위에 서서, 극과 음악의 통일적 표현에 유의하고 있으면서도, 독창의 가창성을 존중하고 또 중창의 충실화와 관현악을 연극에 참여시키는 문제 등에서 남보다 한 걸음 앞서 있었다.

자코모 푸치니

(Giacomo Puccini, 1858. 12. 22. ~ 1924. 11. 29)

자코모 푸치니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친 이탈리아 최대의 오페라 작가로 루카의 생가는 대대로 음악가의 가계로서 아버지도 작곡·연주·교육에 활약 하고 있었다. 일찍 아버지를 잃은 뒤로 가정에서는 그가 음악가로서의 성공을 희망했다. 베르디의 <아이다>에 감격한 그는 오페라 작곡가 로서 입신할 것을 결심하고, 1880년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하여 폰키엘 리에게 배웠다. 폰키엘리는 푸치니의 재능을 사랑하고 세상에 나가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원조를 아끼지 않았으나, 성공작 은 좀처럼 태어 나지 않았다. 오페라의 제3작 <마농 레스코 Mano Lscaut>(1893) 는 몇 사람의 대본 작가를 번거롭게 한 노작으로, 41 세 때 토리노에서의 초연에 대성공을 거두고 드디어 오페라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다시 3년 후, 밀라노에서의 가난한 학생 생활의 경험을 살린 명작 <라 보엠>이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토리노에 서 초연되면서 그의 이름은 더욱 널리 퍼졌다. 이어지는 <라 토스카>(1900)와 <나비 부인>(1904)은 <라 보엠>과 함께 그의 3대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걸작이지만, 어느 것이나 초연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무렵이 그의 창작의 절정기로서 명실 공히 베르디 이후의 가장 큰 오페라 작가로서의 지위가 쌓아 올려진 것이었다. 최종작 <투란도트> 완성 직전 인후암으로 병상에 눕고, 심장마비 때문에 72세로 브뤼셀에서 급서했다. 푸치니의 오페라는 일반 청중의 공감을 부르는 인정미 풍부한 제재를 택하고, 사실적인 효과를 거두도록 준비된 대본에 바탕을 두었다. 음악적으로도 후기 낭만파의 풍려하고 감미로운 수법에 입각하여 풍부한 감정을 고조 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담한 창의를 더해 두드러진 사실성을 나타냄으로써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푸치니의 타고난 날카로운 극장적인 감각에 의해 멋지게 결합되어 있는 점이 그 성공의 커다란 원인이라고 하겠다.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 5. 22.-1883. 2. 13.)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어려서 드레스덴으로 이사하여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고,18세 때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들어가 음악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1832년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첫 오페라 <혼례> 프라하에서, 1834년에는 제2작인 <요정>을, 1836년에는 제3작인 <연애금제>를 뷔르츠부르크에서 완성하였다. 1842년 <리엔치>가 드레스덴 오페라극장 에서 상연된 것을 계기로 드레스덴으로 이사하여 궁정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방황하는 네덜란드 사람>을 직접 지휘하여 초연했고(1843), 다음 작품 <탄호이저>는 1845년에 상연되었다. 또,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여겨 지던 베토벤의 <제9교향곡>을 지휘하여 그 진가를 일반에게 알렸다. 1849년 드레스덴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바그너도 이에 참여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령이 내렸다. 이를 미리 알고 피신하여, 스위스의 취리히로 갔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그를 돌봐준 베젠동크 부인과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베젠동크가곡집>과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담아 승화시켰다. 한편, 1850년에는 바이마르 궁정 극장에서 리스트의 지휘로 <로엔그린>이 상연되고, 1861년에는 <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을 위해 <바카날>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오페라극장에서 3회나 상연되었다. 1864년 봄, 추방이 해제되면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초청으로 뮌헨에 정착하고 작곡에 몰두하였으나 이듬해 1865년 스위스의 트리프셴으로 이사하였다. 그 해에 뮌헨에서 H.뷜로의 지휘로 <트리스탄과 이졸데> 가 상연되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또 1868년에도 역시 뷜로의 지휘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젱거>가 초연되었으며, 1870년에는 리스트의 딸이자 뷜로의 부인이었던 코지마와 재혼하였다. 1870년 바그너는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여 <지크프리트의 목가> 를 작곡하였다. 바그너는 자기 악극을 상연할 극장 건립을 추진하여, 마침내 1876년 바이에른의 소도시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완성시켰다. 이 극장 개관기념으로 대규모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상연하였는데, 전 유럽의 명사들이 몰려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1882년에는 <파르지팔>이 상연되었다. 1883년 2월 13일 벤다르민궁에서 70년의 생애를 마쳤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 1. 27. - 1791. 12. 5.)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의 부친은 잘쯔부르크 교회당의 부악장이며, 궁정 전속 작곡자였다.모차르트가 3세 때 누나 마리아 안나가 클라비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이윽고 누나의 레슨이 끝나자 서슴지 않고 클라비어 앞에 앉더니 단풍나무 잎 같은 손으로 누나가 배우고 있던 곡을 치기 시작했다. 누나보다 잘 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완전한 화성이 붙여져 있었다. 모차르트는 5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클라비어를 배웠고, 이듬해에는 클라비어 곡을 작곡했다. 천재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쉽게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퍼지고,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 남매를 뮌헨·빈·프레스부르크로 다니면서 이 천재를 선보였다. 7세 때 미뉴에트와 트리오, 미뉴에트등을 출판했고, 파리 연주여행을 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루이 15세 앞에서 천재의 묘기를 발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772년에 모차르트 부자는 이탈리아 각지에 커다란 감명을 주었으며, 또한 모차르트 자신도 파드레 마르티니에게 사사하여 작곡 등을 공부할 수 있었다. 성년이 된 모차르트에게 냉엄한 현실의 거친 물결이 다가왔다. 과거 총애를 받았던 오스트리아의 황제는 사망하고, 또 특히 보살핌을 받았던 황후도 퇴위했다. 13세의 모차르트를 관현악장으로 임명하였던 잘쯔부르크의 대사교도 세상을 떠났고, 바뀐 대사교는 웬일인지 모차르트에게 냉담했다. 그리고 성년인 모차르트의 눈에 비친 것은 너무도 낮은 음악가의 위치였다. 21세의 모차르트가 장기 연주 여행 허가를 대사교에게 간청하여 한마디로 부결되었을 때, 모차르트의 불만은 일시에 폭발하여 마침내 대사교에게 사직원을 제출하는 불행이 있었다.

모차르트는 교회라는 당시의 커다란 비호자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므로, 곧 그날부터 생활을 걱정해야만 했다. 작곡과 연주, 이 두 가지가 유일한 수입의 길이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향했고, 모차르트가 베버 일가와 알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베버 가문의 큰딸 알로이지아와 사랑에 빠졌는데,파리로부터의 귀로에 베버 가정을 방문하였으나 알로이지아의 마음은 변해 있었고, 실연한 모차르트의 눈에 비친 것은 알로이지아의 여동생 콘스탄체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1779년, 파리에서 만하임 · 뮌헨을 거쳐 잘쯔부르크에 돌아온 모차르트는 이듬해 1780년부터 잘쯔부르크에 있으면서 작곡에 전념했다. <이도메네오>는 이듬해 1월 29일에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26세 때인 1782년 8월 4일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는데, 이 콘스탄체는 경제 관념이 희박하여 가계는 한층 어려워졌다. 모차르트가 하이든을 만난 것은 1781년이었는데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위대한 작곡가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1785년에 작곡에 착수한 <피가로의 결혼>은 이듬해 5월 1일에 초연되었으며, 이 해에 모차르트는 아버지를 잃었다. <프라하>라고 이름 붙여진 교향곡도 같은 해에 프라하를 방문하여 초연되었는데,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극적인 대면은 이 해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만나서도 매정했으며, 베토벤은 이와 같은 모차르트에게 몹시 실망했던 것 같다. 1788년은 모차르트의 창작열이 폭발한 해였다. 최대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3개의 교향곡 (E♭장조 · g단조 · C장조 「주피터」)이 놀랄 만큼 짧은 시일에 작곡되었고, 피아노 협주곡 D장조 <대관식>도 만들어졌다. 모차르트의 명성은 드디어 높아졌으나, 빈곤은 그의 생활을 점점 더 괴롭혔다. 1790년 <코시 판 투테>가 상연되었으며, 이 해에 거행된 오스트리아의 대관식에서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대관식>이 모차르트 자신의 손으로 연주되었다. 1791년, 모차르트가 35세가 되던 해에 가극 <마적>을 작곡하고 있었을 때 몹시 건강을 해쳤던 것 같다. 그 병고와 경제적인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터에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하는 사자가 찾아왔다. 가엾은 모차르트는 그를 ‘죽음의 사자’라 여기면서 슬퍼하며 작곡에 착수했는데, 이것이 완성되지 않은 채 당시 빈에 유행한 악성 장티푸스에 걸렸고, 마침내 그는 1791년 12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도메니코 가에타노 마리아 도니체티

(Domenico Gaetano Maria Donizetti, 1797.11. 29. - 1848. 4. 8.)

도메니코 가에타노 마리아 도니체티

베르가모의 음악학교와 볼로냐의 음악원에서 공부하였으나, 그를 법률가로 키우려던 부친과의 불화로 군에 입대하여 1818년 군인 신분으로 발표한 <볼로냐의 엔리코>가 호평을 받아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출세작이 된 것은1830년에 작곡한 <안나 볼레나>이며, 이 작품으로 그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35년 파리로 나가 오페라 작가로서의 기반을 굳히고 1840년 전후는 그의 창작력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으나, 1845년 두통에서 비롯된 신체 마비상태에 빠져, 회복하지 못한 채 고향 베르가모에서 사망하였다. 19세기 초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오페라부파에서 오페라세리아로의 전환기였으며, 그는 바로 이 전환점에 위치하는 작곡가였다. 따라서 그의 오페라는 오페라부파의 마지막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랑의 묘약>과 <연대의 아가씨> ·<돈 파스콸레>로부터 <라메르무어의 루치아>·<파보리테>와 같은 오페라세리아의 걸작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내용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은 로시니의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 초기의 작품을 빼면, 유창하고 아름다운 선율과 적절한 극적 효과에 특징이 있으며, 이런 점은 빈약한 관현악법과 대본의 평범함을 보완해 준다.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

(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 2. 29. ~ 1868. 11. 13)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

낭만파 가극의 큰 깃발을 재빨리 이탈리아에서 내건 로시니는, 밝고 기지에 찬 음악에다 아름다운 가락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오늘날에도 크나큰 감흥을 남기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그 도시 도살장의 감독관이자 또 지방극장의 트럼펫 주자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굉장히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 10세 때 양친을 도와서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프리넷티에게 하프시코드를, 안젤로 테세이에게 창법과 화성을 배웠다. 15세 때는 볼냐로에 있는 리세오 음악원의 마티 대위법 교실에 들어가 별도로 첼로를 배웠다. 그리고 조그만 가극이지만 <데메트리오>라는 곡을 작곡했으며, 그리고 이듬 해에는 칸타타로 상패를 받았다. 18세 때의 작품인 1막의 희가극 <약혼 어음>은 베네치아에서 상연되어 로시니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이어서 <탄크레디>와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이 상연됨에 따라 로시니의 이름은 이탈리아 전국에 퍼지고, 그 가극은 대단한 속도로 보급되어 갔다. 로시니의 최대 걸작인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1816년 2월20일에 로마에서 상연, 같은 해의 12월 4일에는 <오텔로>가 나폴리에서 상연되었는데, 이들 가극은 순식간에 전국에 퍼져서 마침내는 빈에까지 전해졌다. 1823년 로시니는 파리를 거쳐서 런던에 갔으며, 이듬해까지 영국에 머물다가 파리로 돌아갔는데, 런던에서는 17만 5천 프랑의 큰 돈을 벌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이탈리아 극장 총지배인으로 취임했다. <윌리엄 텔>은 1829년 파리에서 상연했으며, 왕궁과 시민이 통틀어 열광했던 프랑스에서의 성공은 빈에서의 성공 이상의 것이었다고 한다. <슬픔의 성모>는 1842년에 완성, 이듬해 1월 7일에 파리에서 초연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로시니의 건강은 쇠약해졌고, 1855년 파리로 옮기고부터는 차츰 나빠지더니 1868년 11월 13일 파리에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