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서 깊은 오페라극장으로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다. 파리 오페라극장, 빈 오페라극장과 함께 유럽의 3대 오페라극장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 오페라극장은 1778년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사의 명령에 따라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Santa Maria della Scala) 교회 자리에 설립됐다. 네오 클래식 건축가 주세페 피에르마리니가 설계했다. 개관 기념으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오페라 <L'Europa riconosciuta>가 공연되었다. 1812년부터 로시니의 오페라 <시금석(La pietra del paragone)>, <터키인(Il turco in Italia)>, <세르비아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 <호수 위에 여인(La donna del lago)>, <오텔로(Otello)>, <탄크레디(Tancredi)>, <세미라미데(Semiramide)> 등이 공연되면서 유명해졌다. 1839년 베르디의 <오베르트(Oberto Conte di San Bonifacio)>가 초연되었고, 1842년 <나부코(Nabucco)>가 성공적으로 공연되면서 이 극장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1904년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Madame Butterfly)>도 초연되었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습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 1946년 재건되었다.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기념 연주회와 함께 다시 문을 열었다. 토스카니니는 1898년부터 10년 동안 이 극장의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극장을 변화시켰다. 토스카니니에 의해 이 극장에서 바그너의 작품이 공연되는 등 레퍼토리가 다양해졌다. 마리아 칼라스, 레나타 테발디, 주세페 디 스테파노, 마리오 델 모나코, 엔리코 카루소,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 유명한 성악가들이 이 극장에서 공연해 명성을 확고히 했다. 극장은 2004년 대대적인 보수를 한 뒤 재 개관했다. 극장 안에 있는 박물관은 이 극장의 역사 자료, 음악도구 등을 보여준다. 극장 소속 발레단, 오케스트라, 합창단이 있으며, 예술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이 극장의 공연 시즌은 전통적으로 12월 7일 밀라노의 수호성인인 '성 암브로시우스의 날' 시작된다.
로마 국립 오페라극장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가극장이다. 수준 높은 오페라를 비롯해 콘서트와 발레 등을 공연하는 장소로 이탈리아의 7대 극장에 꼽힌다. 1870년대 도메니코 코스탄치 (Domenico Costanzi)가 설립해 코스탄치 극장(Teatro Costanzi)으로 불렸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나 <토스카>를 초연한 역사가 있으며 그 뒤에는 '테아트로 레아레'라 하여 무솔리니가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처럼 만들고자 개조, 객석을 2,200에서 3,000으로 증가시키고 일류 가수와 일류 지휘자를 갖추어 지적인 향상에 힘썼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명칭도 '테아트로 델 오페라'로 바꾸고 전면적으로 보수하여 현재는 2,300석 정도로 객석이 감소하였다. 이 극장은 음향 효과가 녹음에 적합하여 이 극장에서의 레코드 녹음이 많이 이루어진다. 코스탄치극장은 음향에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전통적인 말편자 스타일의 특징을 살려 오디토리엄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공명실(Resonance Chamber)이 되도록 설계했다. 개관 기념 공연은 로시니의 세미라미데(Semiramide)였다. 왕정이 끝나고 공화국이 되자 이 극장의 이름은 Teatro dell'Opera(오페라극장)으로
바뀌었다. 1958년 로마시의회는 오페라극장의 현대화를 추진하여 현대장비를 도입하는 한편 현관과 메인홀을 대폭 개편하였다. 하지만 이 극장의 음향은 아직도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차대전 후 로마 오페라극장은 수준 높은 공연으로 세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1964년의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1965년의 베르디의 돈 카를로스는 전례없는 훌륭한 해석으로 갈채를 받은 것이었다. 거장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Carlo Maria Giulini)의 지휘와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의 연출이었다. 1958년 1월 2일의 노르마 공연은 아직도 오페라 팬들 사이에 에피소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대통령이 참석한 이날 공연에서 노르마를 맡은 마리아 칼라스가 목소리에 이상이 생겨 1막을 마치지도 못하고 퇴장한 것이다.
1737년 부르봉가(家)의 샤를(Charles) 왕이 창립하였으며, 스칼라극장보다 39년이나 먼저 설립된 유럽에서 가장 전통 있는 오페라극장이다. 당대 유럽 각지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나폴리악파의 오페라 중심지가 되었다. G.로시니(G.Rossini)의 <오셀로>, <모제>,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루이자 밀러>, <아틸라>, G.도니체티(G,Donnizetti)의 <라메르무어의 루치아>등이 이곳에서 초연되었다. 1874~1875년 자금사정으로 잠시 문을 닫은 것을 빼고 1816년 화재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정규 시즌에 빠짐없이 공연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한때 침체기를 겪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칼 뵘(Karl Bhhm)의 지휘로 알반 베르크(Alban Berg)가 작곡한 오페라<보체크>을 공연하는 등 의욕적인 기획으로 눈길을 끌었다. 12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의 오페라 시즌 외에 가을에도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개최하고 있다. 좌석수는 3,500석이며 부속 소극장과 발레학교도 있다. 스칼라극장과 쌍벽을 이루는데, 전속가수들은 양 극장에서 겸직하는 경우가 많다.
원래 1862년 Politeama Fiorentiono Vittorio Emanuele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기념극장) 으로 출범했다. 출범 당시에는 로마의 원형 극장과 같은 노천극장이었다. 1862년 5월의 개관 기념으로는 도니제티의 <람메무어의 루치아>가 공연되었고, 수용 인원은 6천 명이었다. 개관 이후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기념극장은 피렌체 시민들의 문화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출범 이듬해에 화재가 일어나 많은 시설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피렌체시는 즉각 재건에 들어가 바로 그 해에 다시 문을 열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는 노천이 아니라 지붕이 있는 극장이었다. 1930년 피렌체시는 극장운영권을 가져감과 함께 이름도 Teatro Comunale라고 변경했다. 2차 대전 중 테아트로 코무날레는 폭격으로 크게 손상되었다. 재 개관 때 까지는 15년 이상이 걸렸다. 1961년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적 극장인 테아트로 코무날레는 베르디의 <돈 카를로>를 재 개관 기념으로 무대에 올렸다. 극장 내부는 현저하게 변경되었다. 2천 좌석의 오디토리엄은 마치 계단식처럼 만들었으며 박스는 한 층에만 두었다. 극장의 상단 부분은 반원형의 갤러리를 두어 더 많은 사람들이 관
람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마치 처음의 노천극장으로 되돌아간 느낌을 주는 구조이다. 테아트로 코무날레는 1931년부터 시작된 이탈리아 최초의 음악제인 유서 깊은 플로렌스 음악제(Maggio Musicale Fiorentino)의 개최 장소로서 크게 활용되고 있다. 그래서 테아트로 코무날레는 Teatro del Maggio Musicale Fiorentino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피렌체에서 발생한 오페라는 베네치아로 옮겨졌는데, 이는 새로운 예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름진 토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페라는 이곳에서 귀족의 손에서 시민들에게 옮겨갔다. 베네치아에서 처음 오페라가 상연된 것은 1637년 프란체스코 마넬리 작곡의 〈안드로메다〉가 산 카시아노 극장에서 공연된 것이다. 로시니가 베네치아에 온 것은 1810년 산 모이제 극장에서 〈결혼 어음〉을 상연할 때인데, 그로서는 최초의 오페라 상연이었다. 그 후 페니체 가극장으로 바꾸어 1813년에 그의 최초의 작품 〈탄크레디>를 상연했다. 도니제티는 1836년 12월 12일 페니체 극장이 불에 타버리자 원수 같은 경쟁 관계에 있는 아폴로 극장으로 옮겨가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 페니체 극장은 조반니 바티스타와 토마소 메도우나의 형제가 힘을 합해 당시 건축의 권위자로 알려졌던 올시 교수의 설계 협력을 얻어 재건되었다. 1837년 12월 26일 페니체 극장은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재건 파티를 했고, 도니제티도 다음 해〈루덴츠의 마리아〉를 가지고 페니체로 돌아왔다.
베로나의 아레나는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과 나폴리 근처 카푸아에 있는 경기장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원형 경기장이다. 고대부터, 배우들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무대 위를 누벼왔다. 이 경기장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통치 시기였던 서기 1세기에 세워졌으며, 로마의 시인 카툴루스부터 셰익스피어에 이르는 여러 작가들의 펜에 의해 불멸의 도시가 된 베로나에 있다. 영원한 베로나의 상징이자 고고학적인 보고인 이 아레나는 원래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로마 건축술이 일구어낸 승리이다. 로마인들은 도시 성벽 밖에 아레나를 세우고, 지역의 산지에서 캐내 온 하얀 대리석 마름돌을 쌓아 아름답게 꾸몄다. 265년, 갈리에누스 황제에 의해 성벽의 범위가 확장되어 원형 경기장은 도시의 일부가 되었다. 12세기에 지진이 일어나 외부의 원형 벽이 크게 파손되었지만, 그 외에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매우 굳건히 버텨 왔으며, 로마 시대의 원형 경기장 중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축에 속한다. 18세기에는 연극 공연만 전문적으로 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1913년에
는 이곳에서 최초로 야외 오페라 축제가 열렸다. 주세페 베르디의 <아이다>를 공연함으로써 이 행사는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후로 여름날 오후 베로나 아레나에서 상연되는 오페라는, 2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방문객들을 경탄케 하는 이 유적에서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안고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수천 명의 관객들을 이끌고 있다.
전 세계로부터 제 1급의 가수나 지휘자, 연출가 등을 모아 메트로폴리탄에서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그 밖의 오페라를 원어로 들을 수 있다. 이 곳에 서는 것이 세계 오페라 가수의 숙원이며 명가수로서 이 무대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일류의 사람들과 계약하여 높은 수준의 상연을 하고 있으ㅍ나 한편으로는 내셔널 오페라 컴퍼니를 조직하여 미국인 오페라 가수 양성에도 주력하고 있다. 1883년 구노의 <파우스트>로 개장하고, 1892년 화재로 한때 휴장하였다가 1893년에 재건하였다. 세계 최고의 명가수 카루소, 샤랴핀 등이 출연하였으며, 말러, 토스카니니 등 대가들이 지휘하였다. 또한 세계적인 오페라 푸치니의 <서부의 아가씨>(1910), 그라나도스의 <고예스카스>(1916) 등 많은 오페라가 이곳에서 초연되었다. 루돌프 빙 감독시대에 링컨 센터 신 오페라 극장으로 이전하여(1966) 그 해 S.바버의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로 개장하였다. 1973년부터 전속지휘자 제도가 폐지되고 음악감독으로 대치되었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우수한 가수를 모아 매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공연한다. 미대륙 최고의 오페라 극장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페
라 프로덕션에 제작비를 많이 들이는 극장이다. 작품의 시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전통적인 연출 방식을 오랫동안 고수해왔으며, 놀라운 수준의 무대 기술이 특별한 규모의 공연을 가능케 하는 극장이기도 하다. ‘메트(Met)’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이 극장은 1931년에 최초로 오페라 공연을 라디오로 방송했고, 오페라 실황 TV 방송을 처음으로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세계 각국 영화관에서 ‘메트’의 그 해 시즌 공연을 필름으로 선보여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영국 오페라의 중심인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1732년에 개관했다가 1808년에 화재로 무너졌고, 1809년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로 재 개관했다. 1949년에 빅토리아 양식으로 리모델링하였고, 이 건물은 세계 오페라사에서 대단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의 작품들이 특히 자주 공연되는 이 극장은 브리튼, 헨체, 홀스트, 마스네, 티페트, 베버 등의 오페라가 초연된 장소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런던의 거주 지역인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에 위치한 이후, 종종 코벤트 가든으로 불린다. 이 건물은 로열 오페라단, 로열 발레단과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교향악단의 본거지이다. 현재 건축물은 그 장소의 3번째 극장이다. 건물 전면과 휴게실, 관객석은 1858년에 지어졌으나, 현재 복합건물의 거의 모든 다른 요소들은 1990년대의 재건축으로 인한 것이었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2268석과 4층의 박스석, 발코니석, 극장의 정면 관람석 갤러리로 구성된다.
빈 국립오페라의 전신이었던 극장들이 있지만,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빈 국립오페라 건물이 지어진 것은 1869년이었고, 그때부터 줄곧 이 극장은 음악의 도시 빈을 세계에 대표하는 중요한 극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1945년3월, 폭격으로 무너진 이 건물을 재건하는 데 10년이 걸렸고, 재 개관 기념 오페라는 1805년 빈에서 초연된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였다.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로린 마젤, 요제프 크립스,클라우디오 아바도 등의 명 지휘자가 음악 감독으로 이 극장을 이끌었고, 마스네의 <베르테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여인> 등의 오페라가 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탈리아와 독일 양쪽 오페라의 레퍼토리를 고르게 소화하고 있으며 탁월한 연출가들이 걸작들을 탄생시키는 극장이다.
파리를 대표하는 오페라 극장이며 샤갈이 그린 아름다운 천장화로 유명하다. 소설이자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무대로도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다. 설계자 샤를 가르니에의 이름을 따 ‘가르니에 극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1862년에 착공하여 1875년에 완공된 건물로 객석이 2,200석에 달하는 대극장이다. 1989년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이 개관하여 빼어난 연출력과 진취적인 극장 운영으로 대중적인 호응과 인기를 얻고 있지만, 가르니에 극장은 여전히 과거의 광휘를 유지하고 있다.
바그너가 위대한 독일 오페라 작품만을 공연하는 축제극장을 건립하고자 1851년경부터 구상하기 시작하였고, 루트비히 2세의 후원을 받아 1872∼1875년에 건축하였다. 이듬해에 <니벨룽의 가락지>의 전곡 초연으로 개관하였다. 바그너 자신이 직접 설계한 이 원형극장은 관현악단의 자리가 아래쪽으로 패어 있어 음향 효과가 뛰어나며 객석은 1,800석이다. 1883년 바그너가 죽은 후에는 바그너 음악애호가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매년 여름, 바그너의 작품을 상연하는 ‘바이로이트음악제’가 개최된다. 이 음악제에는 바그너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바그너의 작품만이 공연되는데, 보통 <파르지팔>과 다른 한 작품이 선정된다. 이 음악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7년간 중단되었다가 1951년부터 재개되었다. 1883년 바그너의 사후 예술감독은 그의 부인 코지마, 아들 지크프리트, 그리고 1951~1966년에는 바그너의 손자인 볼프강과 빌란트가 공동으로 맡았고, 1966년부터는 볼프강이 단독으로 예술감독을 맡아 2001년 현재까지 상징적인 연출을 선보이고 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호주의 항구 도시인 시드니에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연 예술 장소이다. 개관 이래 약 4500만 명이 방문한 것으로 알려진 이곳에서는 매년 1600회 이상의 공연이 열린다. 오페라뿐 아니라 현대 음악, 발레, 드라마와 댄스 공연, 각종 단체 행사가 진행된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범선과 조가비를 연상시키는 흰색 지붕의 외관이 유명하며, ‘시드니 항구의 바다 풍경과 대도시의 건물이 조화된 창조성’이 인정되어 2007년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56년 국제 공모전에 당선된 덴마크 건축가 이외른 우촌이 설계했다. 개관식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참석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콘서트 홀과 오페라 극장, 레스토랑 건물과 로열 식물원을 비롯한 주변 공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3개의 건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외곽은 테라스 형태로 둘러싸여 걸어서 바다를 보며 건물을 돌아볼 수 있다. 가장 큰 공연장인 콘서트 홀은 27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건물 높이는 최고 약 20층이다. 호주 오페라단, 호주 발레단, 시드니 무용단이 상주하며, 공연 관람은 물론 하우스 투어 프로그램 등이 마련되어 있다.
이탈리아 반도 동쪽의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치비타노바 마르케라는 작은 해수욕장이 있다. 이곳에서 서쪽 산속으로 들어가면 마체라타란 작은 도시가 위치해 있는데, 이 곳에 이탈리아 3대 야외 극장 중 하나인 아레나 스페리스테리오가 있다. 초승달 모양의 극장인 스페리스테리오는 마체라타의 상징이며 매년 여름 야외 오페라 페스티벌이 열리는 주 극장이자, 마을의 성벽, 전망대, 지역 시민을 위한 장소, 놀이공간 등 다양한 기능을 한다. 스페리스테리오 야외 오페라 페스티벌은 우리에겐 베로나의 오페라 페스티벌만큼 익숙하지 않지만 진정한 오페라 매니아들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드는 국제적인 오페라 페스티벌로 1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역사적 도시의 성벽인 Porta mercato의 벽을 허물고 지어진 독창적 스타일의 스페리스테리오 야외 극장은 1923년 Ireneo Aleandri가 팔라디오 양식 모방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디자인 및 설계를 시작해 1829년 9월 완공되
었다. 56개의 도리안식 기둥과 폭 18미터 가로 99 미터의 규모를 자랑하는 이 극장의 원래의 쓰임새는 15세기부터 유행해 왔던 핸드볼 형식의 공놀이 펠로네(Pellone)를 위한 경기장이자 투우 경기장으로, 현재의 관객석은 투우 경기를 위한 외양간으로 사용하기 위한 용도로 계획되었다. 교황령으로 투우는 사라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의 공놀이에 대한 관심이 축구로 대체됨에 따라 스포츠 경기장에서 오페라 극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현재 아레나 스페리스테리오 극장은 한번에 3500명에서 4500명까지 수용할 수 있게 되어있다.